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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01

2024.AUTUMN

여행하는 이론과
고유한 비평

한국 비평 이론의 여행을 위하여

​글. 황호덕

1. 여행과 망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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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에서 비평은 무엇일까. 비평은 어떻게 이론이나 작품과 관계 맺는 것일까. 여기에 대해선 하나의 통념 혹은 회한들이 있는 것 같다. 이를테면 이론은 늘 밖에서 온다. 비평은 밖에서 온 이론으로 안에서 길어 올린 작품을 해석하고 평가한다. 그래도 좋은가. 도래한 이론을 비평이 고유한 작품들을 매개로 ‘이식’해온 것은 아닌가. 고유한 땅에서 나온 소리와 문자와 움직임과 이미지들을 거름으로 이식된 이론이란 어쩌면 잠시 머무는 (매번 얼굴이 바뀌는) 저명한 외국인의 한국관(觀)처럼 부질없는 넌센스들은 아니었던가. 통역관 비평으로 좋은가. 

 

   모든 이론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많은 이론은 본래 ‘비평’ 즉 ‘비판’이었다. 상황과 작품에 대한 평가와 관련된 비평은 서술들, 해명들, 분류들, 맥락화, 해석과 분석을 포함한다. 비평의 과정에서 도출된 정식과 명제들이 정합성과 보편적 설명력을 가질 때 그것은 이론이 되는데, 따라서 역사적 상황에 의해 도발된 이론은 대안적 앎과 정치적 변화와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비평이 ‘이론’이 되어 여행을 시작하면 어떨까. 이론은 옮겨다니며, 그 때마다 변화를 거친다.

 

​​​​​​   에드워드 사이드는 이론을 기원, 이동의 여정, 수용과 저항의 조건, 변형과 적응의 단계들로 나누면서 현실에 긴박된 이론이 기원을 넘어 이동하게 되면, 본래적 힘을 상실하고 ‘해석의 장치’가 되어 길들여진다고 말한다. 예컨대 물화와 소외의 경험을 근거로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의식을 역사의 원리로 제시한 루카치의 이론이 루시앙 골드만에 의해 라신과 파스칼의 개체와 전체에 관한 비극적 세계관으로 재해석이 될 때 그 눈부신 성취에도 불구하고 그 이론은 하나의 해석 장치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비판이 힘이 아닌 권위가 될 때 여행은 끝난다.

 

   흥미로운 것은 사이드가 이내 자신의 말을 수정하기 위해 다른 글(「여행하는 이론 재론Traveling Theory Reconsiderd」)에서 ‘이론의 대안적 형태’로서의 본래적 이론에의 거부와 저항, 즉 위반하며 ‘횡단하는 이론’의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주체와 객체 타협, 종합과 총체화를 거부하며 아도르노는 12음조와 조성 음악과의 종합 가능성을 부정한다. 반면 루카치 이론과의 긴장을 통해 웅변적인 굴절을 보여준 프란츠 파농의 사례는 혼란과 이질성의 상황 속에서 어떻게 루카치의 물신 분석과 소외 이론이 질병으로 가득한 알제리의 어둠에 의해 소환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한에서 여행하는 이론의 특징적인 다음 장을 구성한다. 물신화된 사회 속에서의 프롤레타리아의 소외라는 이론은 기원에서는 추상적이었지만 식민지에서는 오히려 핵심 가치인 땅의 박탈이라는 아주 구체적인 형태로 나타난다. 루카치에겐 역사에서 의식이 우선성을 가졌지만, 프란츠 파농에게는 의식과 주체를 넘어서는 역사, 특히 지리의 우선성이 문제가 된다. 주체성이란 오디세우스의 모험을 좋아하는 유럽인들이 주변 지역에 와서 구성한 식민주의에 의해 눌러붙은 입과 개구(開口) 장애를 낳을 뿐인 것이다. 주체와 객체가 식민자의 지역과 원주민 지역을 그 자체로 환기하는 한에서 통합과 종합이란 없고 둘 중 하나가 ‘잉여’라면 오히려 전투적인 주체와 객체의 변증법은 폭력의 문제가 된다. 

   그러니까 계급의 민족 혹은 인종으로의 변형? 그게 다는 아니다. 루카치가 전제하는 헤겔 식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은 식민자와 피식민자의 변증법을 통과해, 파농의 알제리에 와서 해방 이후에도 잔존할 주객의 복제-떠난 유럽인을 대체하는 경찰과 관료와 상인들과의 투쟁 나아가 검은 피부의 하얀 가면들과의 투쟁이 된다. 

루카치의 계급의식의 어떤 명제, 프롤레타리아트 자신과의 투쟁은 그 불타는 핵심을 재점화하며 해방된 국가에서의 ‘새로운 영혼’의 발명이라는 과제로 변형된다. 헤겔의 변증법에 대한 루카치적인 재해결책 안에서 안심하기를 거부하는 아도르노와 파농의 사례가 ‘지리적 분산’은 이론이 ‘활용’이 아니라 ‘끌어당김’ 혹은 인력의 문제임을 보여준다. 손쉬운 보편주의나 과잉일반화를 포함하는 총체화 없이도 이론의 운동은 다른 지역, 장소, 상황 속에서 적극적인 운동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사이드는 ‘결연affiliation’이라 말한다. 요컨대 여행하는 이론은 (내/외부의 분열을 끌어안으면서도) 비타협적 실천이 될 가능성이 있다.

2. 망명한 이론과 고유한 비평

  여행하는 이론에 대한 사이드의 명상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유는 그가 이론의 ‘무한한’ 여행, 즉 이론의 항해(voyage)와 ‘망명’(exile)을 스치듯 함께 언급한 대목 때문이다. 사이드는 이론의 작업, 비평, 탈신화화, 세속화, 탈중심화는 끝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한편 바로 그 다음, 이론의 핵심은 여행한다는 것, 항상 그것의 한계를 넘어 움직이고 이주하고 어떤 의미에서 망명 상태로 남는다는 것이라고 쓴다.


  망명한 이론은 다른 이론이 되어 새로운 항해를 시작하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파농의 비판이 이미 하나의 이론이 되어 있음을 알고 있다. 또한 루시앙 골드만의 비극적 세계관이 루카치에 진 빚과는 별도로 그가 발생론적 구조주의라 명명한 해석의 장치가 하나의 이론으로서 한국 비평에 고유화(vernaculization)되어 있음을 느낀다. 골드만의 라신과 파스칼의 비극적 세계관에 대한 해석은 그 자체로 하나의 이론이 되어 여행하며, 김우창의 한용운 시에 대한 형이상학적 근본주의 비판(「궁핍한 시대의 시인」, 1973)을 통해 새로운 정박지에 이른다. 그리고 그것은 신비평의 구체성의 시학을 매개로 하여 ‘내재적 초월론’(구체적 보편성론)이라는 한국 비평 이론의 한 원천이 되어 있다.
  이론은 기원을 갖지만 그것이 다른 장소에서도 설득력을 갖는다 믿어지는 순간여행을 시작한다. 비평은 이론의 닻이다. 새로운 땅에 도착한 이론은 그 땅의 작품과 그에 대한 비평을 통해 새로운 땅에 뿌리를 내리게 되고, 축적된 비평적 수험들은 그 이론에 저항하는 한편 그것을 변형하여 고유화한다. 항해가 아니라 망명이되고, 나아가 그 땅의 고유한 것이 되는 순간이다. 그 때 그 이론은 기원과는 별도로, 하나의 다른 이론이 될 수도 있다. 마찬가지 의미에서 또다른 여행을 시작할 수조차 있다.  

    한국 비평이 이론들과 맺는 관계는 어떤 것일까. 해석 장치로 누그러진 비평 혹은 대여된 장치, 번안인가? 어떤 때 한국 비평은 불타는 핵심이 재점화된 비타협적 실천이 될 가능성을 열게 되는가. 우선 공산주의 혹은 사회주의와 한국 비평의 관계를 떠올려 보자. 우리는 아시아에 대한 공산주의적 지식, 이를테면 아시아적 생산양식론과 같은 아시아 농업 사회에 대한 편견에 가득찬 봉건 유제(遺制)에의 주장이 한편으로는 마르크스주의 안에 잠재한 식민주의를 활성화해 비유럽세계의 실천적 비평들을 제한해왔음을 알고 있다. 혁명은 너무 빠르다. 혁명의 기운은 무르익었다. 이 양자 사이의 논쟁이 비판적 에너지와 실천을 소진시키는 한편, 부르주아지 혁명과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동시에 수행해야 한다는 일회혁명론을 점화해 온 것도 사실이다. (중국, 베트남, 북한의 사회주의화는 여행 온 ‘이론’대로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일회혁명이든 연속혁명이든 다른 ‘이론’의 길-결연의 방식이 있을 터였다.) 계급을 민중으로 민중을 민족으로 번안하는 한편 대유( 代喩)하면서 파농이 알제리에서 한 일에 견줄 수 있을지도 모를 비평적 실천을 해나간 백낙청의 민족문학론을 떠올려 보아도 좋을 것이다. 루카치의 역사와 계급의식에 대한 사유가 백낙청의 비평 면면에 숨어 있을지라도, 이것을 대여 혹은 번안이라고 할 수는 없다. 냉전에 결속된 분단이라는 상황, 상례화된 고유한 위기를 세계체제에 결합된 분단체제 나아가 민족문학이라는 과제에 결연하여 ‘세계문학’에 아직 도래하지 않은 문학을 창출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 이론화하는 일종의 기회론은 당시로서는 큰 인화력을 지닌 비평의 이론화, 여행하는 이론의 고유화 방식이었을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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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편 이론이 해석의 장치가 되는 일 역시, 사이드의 생각과는 달리 이론의 국지화 과정에서는 단순히 권위에 의한 논증이나 이론적 실천력의 상실이나 이론의 부식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를테면 신비평new criticism이라는 미국문학의 이론적 운동이 한국이라는 여행지에서 펼쳐낸 세계만 해도 단순한 것이 아니다. 백철에게 신비평은 이데올로기를 휘발시키는 독특한 해석 장치로 냉전과 분단 속에서 스스로를 정치적으로 보호하며 ‘현대문학 연구’라는 아카데미즘을 만들어가는 과학의 일부였다. 의도나 감정이 아니라 역설, 아이러니 애매성, 긴장과 같은 텍스트의 형식 요소에 대한 꼼꼼한 읽기는 문학을 학문적 분과로 제도화하는 장치인 한편, 문학을 보호하는 사회적 장치이기도 했다. 백철의 기치 아래 신비평을 학습한 김윤식이 일본 유학을 기화로 하여 루카치를 만나고 『소설의 이론』이라는 근대 서사시론을 통해, (그리고 그 뒤쪽에 ‘사회주의자’ 루카치의 저작을 숨겨 읽으며) 한국소설사를 ‘총체성’의 관점에서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할 때, 그것이 이론의 재점화인지 해석 장치화인지를 간단히 구별하기란 어렵다. 왜냐하면 그것이 장치인 한에서 이미 사회주의 문학을 포함하는 불온성을 불러들일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론의 결연은 서로 다른 상황 안에서 일어난다. 때때로 마르크스는 커녕 루카치 읽기마저 금지된 20세기 한국에서라면 어떤 이론은 여행이 아니라 잠행에 가까운 형태로 이동한다. 이 잠행이 거쳐간 흔적은 이미 고유하지만 여전히 보편성을 잃지 않는다.  

   ‘지리적 분산’은 이론이 ‘활용’이 아니라 ‘끌어당김’ 혹은 인력의 문제임을 보여준다. 이론은 선택적 친화력을 갖는다. 손쉬운 보편주의나 과잉일반화를 포함하는 총체화 없이도 이론의 운동은 다른 지역, 장소, 상황 속에서 적극적인 운동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재점화하는 결연과 대여를 통한 번안은 어디까지 선명히 구별되는 것일까. 김현은 아도르노로부터 화해하지 않는 전위라는 이론적 전제들을 이입하여 1970년대의 소비사회의 소외와 억압 현상에 대한 문학적 대응을 지향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문학은 억압하지 않으며, 억압하는 사회에 대항한다.) 루카치가 계급의식에 건 소외의 극복이라는 과제를 김현은 ‘문학’ 그 자체에 건다.(“문학만이 할 수 있다”) 김현 특유의 문학사 이론으로 잘 알려진 이른바 ‘감싸기’ 이론은 롤랑 바르트의 기표와 기의 사이의 끝없는 미끄러짐에 관한 구조주의적 아이디어로부터 나왔다. 전위로서 전통을 감싼다는 김현 나름의 문학사론이 신화가 언어를 감싸서 다른 의미를 발생시킨다는 롤랑 바르트의 기호학에서 나왔다면, 또 대중문화의 영향력 그 자체가 ‘새로움’과 ‘전위성’의 자원이 되는 한국의 상황(특히 1980년대 말)에 대한 시론들이 아도르노의 비판이론에서 나왔다면, 이것은 이미 결연이나 번안을 넘은 이론의 ‘고유화’ 과정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물론 그것이 하나의 비평적 입사점을 넘어 이론이 되기 위해서는 여행을 떠난 그 ‘이론’이 어떤 선택적 친화력을 가진 장소에 이르러야 할 터이지만. 

3. 세계화하는 한국에서
    한국화하는 세계까지

   에드워드 사이드는 자신을 세계와 텍스트 사이에서 비판적 거리를 재며 쓰는 비평가라고 말한 바 있다. 그래서 어떤 포스트콜로니얼 비평들은 이렇게 묻곤 했다. 대체 그 비평가는 ‘어디서’ 그렇게 할 수 있는 걸까? 그런 사심 없는 비평가의 자리, 칸트가 『판단력비판』에서 말한 그런 자리가 우리 시대에도 상정될 수 있는 걸까. 세계와 텍스트 양쪽으로 거리를 둔 비평가라는 외부 공간은 어디에 존재할 수 있는가. 이론의 여행에 대한 사이드의 사색만 하더라도 루카치라는 사실상 단일한 이론적 기원으로부터의 지리적 분산을 언급하는 방식은 이론의 끝없는 이행보다는 여전히 하나의 확산 모델처럼 보이기도 하고, 보기에 따라서는 『오리엔탈리즘』의 저자답게 아도르노의 거부보다는 파농의 변형과 실천적 재점화에 훨씬 기울어져 있는 탈식민주의 비평처럼도 보인다. 그럼에도 사이드는 파농을 이론가로 부르기를 주저하는 듯 느껴진다. 그러나 시인 김남주가 변방의 시인으로서 파농을 번역하겠다고 결심했을 때, 그는 아마 마르크스라는 가능성의 중심이 아니라 제3세계, 다른 대륙의 실천적 유산으로부터 ‘다른’ 길을 마련하려 했을 터이다. 투사인 번역가 김남주에게 파농은 이미 탈식민주의 비평의 모범일 뿐 아니라 대체할 수 없는 이론가였다.

 

   앞서 이론은 밖에서 오고, 비평은 밖의 이론을 작품의 해석을 통해 내재적 자원으로 만든다고 말했다. 아니, 흔히 그렇게들 여긴다고 썼다. 그렇다면 비평의 척도-이론은 이제 안에서 만들어져야 하는 걸까. 그럴 수 있는가. 비판의 척도가 밖이 아니라 내재적인 것에서 나와야 할 때, 사실 이미 그러한 내재성 그 자체가 세계성이 되어 버렸다고 말하고 싶다. 한국은 이미 자본주의의 변죽이 아니라 그 모든 성취와 모순이 극단화되어 있는 핵심이 되어 있다. K지구(地區)가 아니라 K지구(地球)가 된 게 아닐까? 이제 한국의 세계화가 아니라 세계의 한국화(koreanization)가 문제가 아닐까. 한국적 모순의 세계적 편재-젠더 평등과 여성의 성취에 관한 자본주의의 거짓 약속, 민주화된 능력주의(meritocracy) 사회라는 거짓 합리성, 신자유주의 하의 ‘사회’의 종말과 안정망 없는 자기경영 안으로 던져진 개인들-한국은 세계 어디에나 있는 곳이면서, 그 어느 곳들의 극단들이 여행온 모순들의 망명지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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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가 한강의 노벨상 수상이라는 믿기지 않는 일이 과연 믿어지는 이유이다. 한국, 아시아, 그리고 세계의 독자들의 역사와 젠더, 또 지구 정치에 대한 감각과 읽기 훈련이 가 닿은 곳에 한강의 문자들이 있었을 것이다. 고유한 모순이 고유한 저항과 문화와 그것을 그려내는 고유한 미학을 낳고 있다면, 어떤 이론이 어디서 여기로 왔든 그 이론은 이제 한국의 어떤 비타협적 비평의 실천들을 통과해 세계를 여행하게 될 것이다. 그 때 그 비평에는 ‘이론’이라는 이름이 붙게 될 지 모른다.

  내가 여기에 쓴 비평적 단편들이 그런 ‘한국’ 이론의 여행이나 한국 비평의 보편성을 의제로 한 것은 물론 아니다. 이론이 여행왔던, 나아가 한국 사회와 학술의 변화를 불러일으키며 실천적 망명에 가까워졌던 ‘비평의 시대’ 혹은 ‘비평의 세기.’ 사이드는 「여행하는 이론 재론」(1994)에서 거듭되는 이론의 무중력, 독단 혹은 정통성에 대한 분노, 우리가 종종 굴복하곤 하는 지겨운 옹호의 표현들을 진지하게 극복하는 방법은 이론이 어디로 가는지, 어떻게 거기에 도착했는지를 알아내는 시도들을 해나가는 일이라고 말했다.

불타는 핵심이 재점화된 순간을 확인하는 일 혹은 해석 장치들의 눈부신 성취들을 확인하는 일 말이다.

사진

1. 에드워드 사이드, atticusreview 2. 루카치 죄르지, Kep forrasa: MT

3. 프란츠 파농 4. 한강, 한강홈페이지 책. 황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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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황호덕

문학평론가. 성균관대 교수. 지은 책으로 <벌레와 제국>, <프랑켄 마르크스>, <근대 네이션과 그 표상들>, <개념과 역사, 근대 한국의 이중어사전>(전 2권, 공저)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근대어의 탄생과 한문: 한문맥과 근대일본>, <미주의인상>(공역)이 있다. 캘리포니아 주립대학교(어바인), 프린스턴 대학교, 일본 조사이 국제대학에서 연구와 강의를 했다. 고석규비평문학상과 한국비교문학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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