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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12

2025.12

물에서 뭍으로

: 전통 속 기획의 좌표

​글. 김이끼

제작의 기준을 둘러싼 익숙한 방식 속에서 기획이 놓여 있던 자리를, 보이지 않던 깊이에서 드러나는 자리로 옮겨 바라본다. 전통 분야에서 오랫동안 이어져 온 제작 방식 안에서 기획의 역할은 마치 수면 아래 잠긴 것처럼 드러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이제 그 자리를 물 위로 올려, 제작 과정에서 기획자가 보고 느낀 질문들을 함께 나누고자 한다. 작품을 어디서 만들었는가에서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로 시선을 옮기는 시도다.

ⓒ국립현대무용단, 2025, TW (2)_edited_edited.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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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de by: 어디서가 아니라, 누구의 의해

오늘날 한 작품을 어디에서 만들어졌는가보다, 누구에 의해 기획되고 제작되었는가로 설명하는 방식이 점점 중요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2025년 여름, 국립현대무용단과 무용 영상화 사업의 일환으로 한 편의 댄스필름을 제작했다. 이 작품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 지점은 제작의 구성 방식이었다. 출연 무용수 가운데 한 명을 제외하고 모두 해외 무용수였고 촬영 역시 대만에서 이루어졌다.

작품의 서사와 정서적 맥락을 고려할 때 이러한 선택은 이해될 만했다. 특정 장소의 분위기와 질감은 작품의 이미지를 견고하게 떠받쳤고, 대만이라는 배경 또한 그 지역이 지닌 특성이 유기적으로 작동하며 임의적으로 소비된 공간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타당성이 남겨둔 질문도 있다. 영상화라는 기록성과 공공성을 전제로 하는 국공립 예술단체 사업에서 예산 집행이 해외 인력과 공간에 집중되는 구조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하는 지점이다.

이 질문은 단순히 참여 인력의 국적 비율이나 로케이션 선택의 문제로 환원될 수 없다. 더 본질적으로는 오늘날 한국에서 작품 제작의 기준을 무엇으로 삼고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여전히 작품을 설명할 때 ‘어디에서 만들어졌는가’를 먼저 묻는 방식에 익숙하다. 한국의 장소성, 인력 구성, 한국적 소재는 작품의 귀속을 판단하는 주요 기준으로 자리해 왔으며, 이러한 관성은 자연스럽게 made in의 관점을 강화해 왔다.

ⓒ국립현대무용단, 2025, TW (1)_edited.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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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댄스필름은 다른 기준을 떠올리게 한다. 작품은 대만에서 촬영되었고 다수의 해외 무용수와 협업했지만, 기획과 창작의 방향 설정, 제작 구조 설계, 유통 및 결과물에 대한 책임은 국립현대무용단이라는 분명한 주체에 의해 수행되었다. 다시 말해, 이 작업을 성립시키는 핵심은 장소나 참여 인력의 국적이 아니라, 제작을 주도한 주체에 있었다. 여기서 요청되는 것은 국적을 새로 부여하는 언어가 아니라, 누가 이 작업을 만들었는가를 설명하는 기준, 즉 made by의 관점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한국의 제작 환경은 여전히‘장소와 국적’을 중심으로 한 사고에 머물러 있다. 해외 진출 역시 새로운 협업의 과정보다 이미 한국에서 완성된 작품을 해외로 판매하거나 유통하는 문제로 이해되는 경우가 많다. 제작의 초기 단계부터 다국적 인력과 공간을 전제로 사고하기보다는, 완성 이후의 유통과 시장 전략에 무게가 실리는 셈이다. 그러나 제작의 주도권을 기준으로 삼는 made by의 개념은 다른 가능성을 제시한다. 한국이 투자와 제작 구조를 설계하고, 창작의 책임과 유통 권한을 주도적으로 확보한 상태에서 만들어진 작품이라면, 그 재료가 다른 문화권의 인프라와 서사를 포함하더라도 하나의 주체에 의해 성립한 작업으로 설명될 수 있다. 이는 특정한 ‘한국성’을 반복 재현하는 방식과는 다른 차원의 확장이다.

ⓒKCCNGR, 2025, NG_edited.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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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댄스필름 작업은 그런 가능성을 경험한 하나의 사례였다. 장소와 국적을 넘어선 제작 방식이 이미 실현되고 있음에도, 우리는 여전히 작품을 설명하는 언어에서 made in의 틀을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 어쩌면 지금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작품이 아니라, 제작을 사유하는 기준과 언어를 다시 설정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전통이라는 구조 안에서 기획하기

전통을 다루는 공연예술 기획자는 종종 상반된 요구 사이에 놓인 존재로 느껴지기도 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기획이라는 개념이 전통이라는 장르 내부에서 충분히 작동해 온 역사가 길지 않다는 조건과 마주하게 된다. 전통은 특정한 미학이나 형식 이전에 기획의 역할과 범위를 일정한 방식으로 규정해 온 구조로 기능해 왔다. 그 결과 전통 기반 공연예술에서 기획은 장르의 방향을 설계하는 판단의 영역보다, 이미 설정된 틀을 운영하는 기능으로 인식되어 온 측면이 적지 않다.

이러한 맥락에서 콘텐츠(작품)를 중심에 둔 프로듀서 연대는 하나의 대안적 질문으로 떠오른다. 이는 제작 조건이나 제도 개선을 중심에 둔 연대보다, 무엇을 만들고 있는가, 어떤 전통을 어떤 방식으로 현재화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공유하는 연결망에 가깝다. 기획자 스스로 자신의 작업을 장르적 맥락 속에서 위치 짓고 서로의 선택을 참조할 수 있는 구조를 상상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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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듀서 연대의 시도는 이미 여러 방식으로 존재해 왔다. 다만 전통을 장르적 기반으로 삼는 영역에서는 이러한 연대가 아직 하나의 분명한 형식이나 언어로 축적되기보다는, 개별적인 시도와 관계망으로 흩어져 있는 경우가 많다. 이는 전통 장르 안에서 기획자 간의 협업과 연대를 사유할 수 있는 구조가 충분히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연대의 필요성은 전통 장르가 해외에서 어떻게 소비되는지를 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전통음악은 여전히 월드뮤직이나 크로스오버와 같은 넓은 범주 안에서 소개되는 경우가 많고, 그 과정에서 서구 관객에게 익숙한 방식이나‘동양적’ 이미지로 해석되는 장면도 적지 않다. 예를 들어 공연의 내용과는 다른 한복 착용이나 장신구 요청, 국악기 특성에 대한 기술적 안내가 반영되지 않는 경우, 홍보 과정에서 작품의 의도와 무관하게‘전통적’ 이미지를 강조해 달라는 제안들이 그러하다. 이때 작품이 만들어진 맥락이나 기획의 의도는 쉽게 축약되고, 전통은 하나의 감정적 코드나 이국적인 분위기로 단순화되기 쉽다. 다만 최근에는 음악, 무용, 연극, 다원 장르 안에서도 기존 분류를 벗어나거나 세분화하려는 시도가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

이처럼 전통을 다루는 기획자들이 각자의 프로젝트 단위로만 대응하는 데에는 한계가 남는다. 자국의 전통을 기반으로 동시대 콘텐츠를 제작하는 기획자들이 서로 연결되고, 자신의 작업을 설명하는 언어와 기준을 공유할 때에야 비로소 주체적인 정체성이 형성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해외 시장의 인식에 일방적으로 대응하는 전략보다, 전통 기반 콘텐츠를 어떤 방향으로 제시할 것인가를 스스로 질문하고 조율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구조는 한국의 예술 지원제도 안에서도 반복된다. 현재의 제도와 정책은 여전히 예술가 즉, 연출가나 실연자를 중심으로 설계된 경우가 많고, 기획자는 그 창작을 가능하게 하는 수행의 역할로 위치되어 왔다. 기획은 하나의 독립된 판단과 설계의 영역보다 이미 정해진 창작을 실행하고 관리하는 기능으로 작동해 온 측면이 크다. 이는 기획자가 콘텐츠(작품)의 장기적 방향이나 장르의 발전을 사유할 수 있는 조건을 구조적으로 제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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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점에서 콘텐츠 기반 프로듀서 연대는 제도에 대한 직접적인 대안이라기보다, 제도가 아직 충분히 포착하지 못한 역할과 감각을 서로 확인하고 축적하는 장이 될 수 있다. 기획자가 단지 창작을 보조하는 존재가 아니라, 콘텐츠의 방향과 맥락을 함께 만들어가는 주체임을 드러내는 방식이기도 하다.

새로운 네트워크는 또 다른 기준이나 규범을 만들어낼 수도 있으며, 특정한 미학이나 태도가 의도치 않게 표준화될 위험 역시 존재한다. 그럼에도 지금까지의 방식만으로 충분히 다루기 어려웠던 질문들을 함께 검토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전통 기획자 간의 연결은 또 다른 방향을 상상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어쩌면 지금 필요한 것은 또 하나의 제도나 시스템이 아닌, 전통을 다루는 기획이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는지를 함께 생각해 볼 수 있는 동료일지도 모른다. 개별 생존을 넘어 상생으로 나아가기 위해, ‘전통’ 그리고 ‘콘텐츠(작품)’를 중심으로 둔 프로듀서 연대는 그 자체로 하나의 실험이 될 수 있다.

위의 글은 결론을 내리기보다, 앞으로 무엇을 질문하며 작업할 것인가를 가늠하는 기록이다. 제작의 기준과 전통이라는 구조 안에서 잠시 물속에 놓여 있던 역할을 뭍으로 끌어올려, 기획의 위치를 다시 생각해본다. 전통을 하나의 장르나 역할로 고정하기보다, 기획의 판단과 책임이 작동하는 조건을 만들고, 각자의 맥락 속에서 작업하는 기획자들이 질문을 공유하며 느슨하게 연결될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해 보고자 한다. 이는 제작 단계에서의 기획 기능과 역할에 대한 논의, 창작 이후 유통 구조를 포함한 공연예술 생태 전반에 대한 관찰, 그리고 국제 교류 영역에서의 시장 정보 및 사례 공유를 통해 기획자와 아티스트가 보다 주체적으로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조건을 모으는 방향으로 확장될 수 있다.

사진

1. ⓒ국립현대무용단, 2025, TW(2)

2. ⓒ국립현대무용단, 2025, TW(1) 

3. ⓒKCCNGR, 2025, NG

4. ⓒLondonjazz Festival, 2025, UK

5.  ⓒMusicmeeting Festival, 2025, N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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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이끼

김이끼는 전통예술에서 출발해 장르의 경계를 유려하게 넘나드는 독립 프로듀서이다. 전통 기반 아티스트를 실험적이고 열린 플랫폼과 연결하는 방식으로 활동하는 프로덕션 이끼 이끌고 있다. 다음 세대를 위한 프로듀서 생태계 지도를 조금씩 넓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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