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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2024.AUTUMN

빗금(/)

왓와이 아트의 <in:out>

글. 성혜인

1. (탈)경계

  탈경계를 선언하는 것은 의아한 구석이 있다. 실험성, 독창성 등을 지시하는 기표로 오인되고 있고 심지어 남용되고 있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탈경계를 선언하는 작업에 반해 경계에 대해 질문하는 작업은 매우 적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전통과 현대의 경계를 허물고 새로움을 만들어 내겠다는 선언은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반면 전통과 현대가 무엇인지, 둘의 경계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궁극적으로 경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질문하는 경우는 드물다.

  어떤 것이 개념으로 구획되어 있다면 사회적으로 혹은 정치적으로 합의된 고유한 영역이 있다는 의미다. 이에 대한 탐구가 선행되지 않은 탈경계는 무엇을 의미할까. 경계에 대한 사유보다 탈경계에 대한 선언이 압도적으로 많은 이유는 무엇일까. 더 본질적인 질문도 가능하다. 경계는 선일까. 장소일까. 관념일까. 탈경계는 경계의 한가운데 서는 것일까. 경계를 지우는 것일까. 한시적으로 형성되는 장소일까. 어디서도 보지 못한 풍경일까. 새로운 장소에 대한 상상일까. 아니면 다른 무엇일까. 빈번한 선언에 비해 탈경계가 무엇인지 제대로 짐작하는 것조차 쉬운 일은 아니다. 그만큼 (탈)경계는 흥미롭고 논쟁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왓와이아트의 <in:out>은 두 가지 목표를 갖는다. 첫 번째는 이분법적 개념을 다시 묻는 것이다. 공연의 제목처럼 안과 밖, 삶과 죽음, 전통과 현대, 현실과 가상 등 대립적 개념을 되돌아보고 이로부터 최대한 멀리 나아가볼 것을 제안한다. 두 번째는 <생사의_삶과 죽음에 관한 음악>, <원 모먼트>, <영원한 순간>, <일곱 개의 길>, <트렘블링> 등 그간 왓와이아트가 선보여 왔던 작품을 재맥락화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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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n:out>이 대립적 개념과 그 경계를 사유하는 작업인 만큼 공연예술에 존재하는 여러 구획들을 느슨하게 만드는 장치가 도처에 존재한다. 앞서 언급한 두 가지 목표를 하나로 마름질하기 위한 도구들 말이다. 왓와이아트는 공간과 같은 가시적 영역부터 감각의 영역까지 여러 장치를 마련해 놓는다. 이러한 장치들은 때때로 의도에 가닿고 때때로 전혀 다른 방향으로 실패하며 무수한 빗금, 도식 앞에 우리를 데려다 놓는다.

2. 미끄러지는 장치들

   공연이 이루어지는 공간과 관객에게 부여된 올블랙 드레스코드는 <in:out>이 이분법적 구획에 관한 질문으로부터 출발했음을 보여주는 가시적 단서다. 화이트 큐브인 슈페리어갤러리에 검은색 복장을 한 관객을 배치해 시각적 대비를 의도한 것이다. 드레스코드는 엄격하게 강제된 규칙이 아니었기 때문에 공연 당일 극적으로 대조를 이루는 장면이 연출되진 않았다. 그러나 이분법적 분절과 그 경계를 벗어나려 한다는 공연의 핵심 아이디어를 관념적으로나마 예비하게 된다.

  무대 구조도 동일선상에 놓여 있다. <in:out>에서 객석은 화이트 큐브의 중앙을 일자로 가로지르는 형태다. 대다수의 관객은 서로 등지고 일렬로 앉게 되어 있고 한쪽만 수평하게 객석이 한 줄 더 마련되어 있다. 마치 정중앙을 갈라 두 영역으로 분절해 놓은 것 같은 무대는 무대의 전면을 비롯해 무대를 사용하는 방식조차 예측하기 어렵게 만든다. 퍼포머는 계속해서 위치를 이동한다. 여기에 관객은 공연 프로그램에 따라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다는 규칙이 추가된다. 즉, 이 모든 것은 무대와 객석으로 상정되는 영역의 경계를 흐려보려는 장치인 셈이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1회 차 공연에서 관객의 이동은 단 한 차례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퍼포머의 연주를 시야 방해 없이 감상하기 위해서는 이동이 불가피했지만 객석을 떠나는 관객은 아무도 없었다. 시야 방해와 불편한 신체를 꿋꿋하게 견디며 자리를 지키는 관객을 상상해 보라. (관객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나름의 방식으로 관객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무대와 객석, 퍼포머와 관객의 경계를 지우려는 시도는 오히려 각각의 개념이 무엇이었는지,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를 드러낸다.

  <in:out>의 장치는 전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미끄러진다. 목적에 정확히 닿기보다 실패함으로써 본래의 의도를 상실하는 것이다. 무대와 객석의 경계는 꽤 분명해 보이고, 관객은 퍼포머와 같은 동등한 수행자이기보다 완고하게 수동적인 위치를 자처하는 것처럼 보인다. 표면적으로 왓와이아트가 설계한 장치는 어떠한 위상적 변환도 끌어내지 못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럼에도 <in:out>은 이 실패로부터 또 다른 음악적 경험을 만들어 낸다. 관객을 중심에 놓고 긴 타원을 그리듯 좌표를 찍으며 이동하는 퍼포머는 청각적 정보를 여러 방향에서 수용할 수 있도록 입체화하는 역할을 한다. 퍼포머의 비정형적 움직임, 장면으로 인식되는 무대 공간의 지속적인 분할, 이로 인한 시각적 정보의 부분적 차단이 관람의 방해 요소로 인식되기보다, 도리어 음향적 체험의 폭을 넓히고 나아가 음악적 시공간을 확장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이러한 경험은 공연의 마지막에 이르러 일종의 미아(迷兒) 상태를 유발한다. 무대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관객 스스로 자신이 어디에 자리해 있는지에 대한 감각이 모호해지며 부분적으로 허물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비로소 <in:out>이 의도했던 누가, 무엇이 안인지 밖인지에 관한 질문이 관객 앞에 도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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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다시 경계

  음악은 공간이라는 가시적 영역과 다른 방식으로 경계를 다룬다. 연주는 1시간 남짓의 러닝 타임 동안 숨 가쁘게 이어진다. 그간 왓와이아트 가 공연에서 선보였던 음악 중 11개의 곡을 선별해 재배치하는 시도로, 개별 곡들은 전체를 연주하거나 일부만을 연주한다. 음악과 음악 사이에 큰 공백이 없이 많은 수의 작품이 연달아 연주되었음에도 이질감이 두드러지지 않는다. 11개의 곡이 커다란 하나의 작품처럼 감각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어서다. 서로 다른 작품에서 연주되었던 음악을 떼어내 새로이 나열했지만, 충돌, 간섭보다는 재구성, 재배열에 가깝게 느껴진다.

   배치된 음악에서는 전반적으로 삶과 죽음에 대한 모티브가 강하게 감지된다. <생사의_삶과 죽음에 관한 음악>에서 선보였던 음악이 공연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간 왓와이아트가 이분법적 구획을 탐구하고 벗어나는 작업을 하면서 음악적으로 가장 빈번하게 다뤄왔던 주제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밀양 나무꾼 신세타령>, <심청가 곽씨부인 상여소리>와 같은 민속악 작품을 비롯해 제례악을 모티브로 한 <종묘제례악 전폐희문>, <endless summer> 시리즈, 이승과는 다른 “그곳”의 모습과 소리를 상상한 <출입> 등만 보더라도 쉽게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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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n:out>은 왓와이 아트의 음악적 배경을 통해 유추할 수 있듯 대부분 현대음악의 문법을 따르는 듯 보이지만 특정한 하나의 음악적 관습을 따른다고 갈음하긴 힘들다. 독특한 주법을 사용하며 고도로 계산된 소리를 쌓아 나가기도 하고, 텍스트를 노래와 읊조림, 연기 사이에 배치하며 스산함을 발생시키기도 한다. 때로는 <포구락>이나 <수제천>처럼 댄스필름을 병치해 음악의 구조나 형식이 아닌 연행의 의미나 가치를 비트는 시도를 선보이기도 한다.

   대부분의 곡이 전통 레퍼토리로부터 출발해 여러 방식으로 재맥락화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표면적으로 전통음악과 현대음악의 장르적 컨벤션을 뒤섞는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전통의 윤곽이나 흔적, 구조, 가치를 거울삼아 재건축하는 방식에 가깝다. 궁극적으로 왓와이아트가 <in:out>에서 넘나드는 간극은 음악적 문법이나 장르라기보다 이들이 다루는 전통이 자리한 시간과 공간이다. 전통이 존재하던 시공간에서 분리해 왓와이아트의 관점과 충돌시키며 또 다른 맥락을 갖게 만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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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처음의 (탈)경계에 관한 논의로 돌아가 보자. 구획, 분리, 도식, 개념에는 필연적으로 누락되는 것이 생긴다. 빛과 어둠 사이에 펼쳐지는 무한한 스펙트럼처럼 개념화될 수 없는, 개념화될 필요조차 없다고 여겨지는, 개념화될 기회조차 없었던 것들이 우리 곁에 분명 존재한다. 사회는 때론 전혀 다른 것임에도 편의상 익숙한 개념으로 현상이나 존재를 설명하기도 하고, 개념으로 설명될 수 없거나 포섭되지 않는 것은 없는 존재로 취급하기도 한다. 힘의 논리에 의해 사회가 부여한 이름들과 경계에 대한 탐구는 궁극적으로 이데올로기에 대한 탐구다. 어쩌면 탈경계는 무수한 구획의 폭력성을 드러내고, 누락되거나 이름 없는 존재들에게 자유를 부여하기 위한 상상을 펼치는 시도일지도 모르겠다. 무수한 탈경계 선언이 경계를 인식하는 것으로부터, 오히려 개념을 더 깊이 고찰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면 어떨까. 이러한 고민의 한쪽에 왓와이아트 <in:out>이 자리하고 있다.

사진

왓와이 아트 <in:out> 공연 c.김신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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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성혜인

음악평론가. 음악비평동인 ‘헤테로포니’ 필진, 비평지 ‘오늘의 작곡가 오늘의 작품’ 편집위원,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이다.

음악과 공연예술 안팎에서 이루어지는 여러 문화적 실천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강의, 방송, 자문 등의 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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