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Issue 04
2024/25.WINTER
서용석의 유산
: 서용석의 대금산조와 나의 작품 오늘은 아무것도 쓰지 않았다 (Vol. 1)
글. 세바스티안 클라렌(Sebastian Claren)
이 글은 2021년 12월 17일 서울대학교에서 열린 국제 심포지엄 '동서양, 서양과 동양의 만남'에서 세바스티안 클라렌이 발표한 강연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편집자 주)
1. 한국 전통 음악
나는 1990년대 후반 베를린에서 왈터 짐머만(Walter Zimmermann)과 작곡을 공부할 때 한국 전통 음악을 처음 접했다. 당시 한국인 동료 학생이자 1998년 슈투트가르트 작곡상을 받은 재능 있는 작곡가인 조정은이 레이블이 없는 카세트테이프를 빌려주었다. 그 테이프에 담긴 음악은 신쾌동 명인이 직접 연주한 거문고 산조였던 것 같다. 당시 그 친구에게서 들은 정보는 그 곡이 거문고 산조라는 것뿐이었다.
나는 그 음악의 투박하고 흙냄새 나는 소리, 연주의 정확성, 그리고 상당히 긴 시간 동안의 정교한 형식적 제어에 즉시 매료되었던 것을 기억한다. 또한 20세기 서양 악기로는 비슷한 음악을 구현하기가 어려우리라는 것을 매우 빨리 알아차렸던 것 같다. 왜냐하면 서양 악기는 큰 콘서트 홀을 채우기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와 비슷한 정도까지 정교한 제스처와 장식음을 구현하는 데 필요한 소리의 집중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국악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지만, 유럽에서 구할 수 있는 음반은 거의 없었고, 지금 한국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음질과는 거리가 멀었다. 또한, 국악의 사상과 아름다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국악의 정체성을 확립한 명인들의 역사적인 녹음을 듣는 것이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내가 국악에서 매력적으로 느끼는 특징 중, 특히 젊은 층과 실험적인 청중들에게 국악의 장점을 알릴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특징들이 최근 들어 다소 부드러워졌기 때문이다. 사실, 조정은이 신쾌동의 전통 음원 대신 현대적인 국악을 들려줬다면 지금처럼 깊이 감명 받았을지 확신할 수 없다.
그다음에 국악과 직접적으로 접하게 된 것은 훨씬 후인 2012년 10월, 베를린 페스티벌에서 박 민희가 이수경이 디자인한 무대에서 여창 가곡 독창곡을 선곡하여 불렀을 때였다. 그 무렵 나는 벨칸토 창법에서 벗어날 수 있는 새로운 스타일의 창법을 찾고 있었다. 나는 벨칸토 창법이 20세기와 21세기의 현대 음악의 대부분을 지배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가곡을 들었을 때, 이것이 바로 내가 찾고 있던 것임을 알았다. 그러나 서양식 벨칸토 창법으로 훈련된 목소리로 비슷한 결과를 얻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도 분명했다.
나는 막막했다. 국악에서 들은 것이 작곡가로서 내가 가진 많은 의문에 대한 해답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어떻게 연결할 수 있을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이 무렵, 독일에서 국악을 꾸준히 알리고 있는 나의 친구 마티아스 엔트레스(Matthias Entreß) 씨가 국립국악원 국악 워크숍에 지원하라는 조언을 해주었다. 이 워크숍은 외국인을 대상으로 매년 서울에서 2주간 진행되는 국악 프로그램으로, 나는 2014년에 참가하게 되었다. 이것이 내게 문을 열어준 계기가 되었다. 많은 국악 연주자와 개인적으로 접촉을 하면서, 마침내 오랫동안 좋아했던 음악에 대해 더 많이 배울 현실적인 기회를 얻게 되었다.
나는 서울에서 가야금을 샀는데, 베를린에 돌아왔을 때 한국문화원이 베를린에 한국 전통 공예 장인 4명을 초청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중 한 명은 대금 제작자였다. 나는 전화해서 대금을 살 수 있는지 물어봤고, 몇 번의 협상 끝에 가능하게 되었다.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비쌌다. 돈을 더 썼다는 단순한 이유로 나는 가야금 대신 대금을 배우기로 했다.
1) 10년 후인 2022년, 나는 전통 가곡을 바탕으로 한 대규모 가곡 연작을 완성했다. 이 작품은 한국계 미국인 예술가이자 작가인 테레사 차학경의 글을 바탕으로 한다. 이 작품은 2022년 6월 국립극장에서 박민희가 독창자로 출연하고 왓와이 아트 앙상블과 함께한 공연으로 초연되었으며, 이후 비엔나에 기반을 둔 KAIROS 레이블을 통해 스튜디오 녹음본으로 발매되었다.
2. 대금 배우기
대금은 우연히 선택하게 되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배우고 싶었던 악기로 대금을 선택한 것은 정말 행운이었다.
첫째, 당시 베를린에 살고 있던 대금 연주가 유홍이 한국문화원에서 강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서용석, 김중섭 등 여러 거장들에게 사사했고, 유럽 현대 음악계에 대금을 소개함으로써 이름을 알렸다. 그는 이 세대의 대표적인 대금 연주자 중 한 명이며, 대금 연주에 있어 전통 음악과 현대 음악 모두에서 탁월한 전문가이다. 다시 말해, 그를 만나 함께 공부할 수 있었던 것은 정말 행운이었다.
둘째, 대금은 다른 전통 한국 악기들과 달리 서양식 기보법이 아닌 전통 한국식 기보법인 정간보로 배운 다는 점이다. 정간보로 연주하는 법을 배우는 것은 긴 과정이었다. 그러나 연주하는 음악에 맞게 설계된 기보법과 전혀 다른 음악 제작 사상에 맞춰 고안된 기보법을 사용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곧 알게 되었다.
그리고 셋째, 유홍은 매우 엄격한 선생님이었고, 내게 방향을 알려주는 데 있어 매우 끈질겼다. 물론, 악기를 연주하기 시작할 때 가장 먼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소리를 내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곧 알게 되었다. 내가 연주를 시작할 때마다 유홍은 “아니, 그건 한국적이지 않아”라고 말했다. 물론, 그의 말이 맞았다. 아주 천천히, 내가 대금에서 만들어 내려고 했던 것이 서양의 미적 관념에 매우 부합하는 아름다운 음질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한국의 음에 대한 개념과는 전혀 맞지 않았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이해하는 데 핵심이 된 것은 유홍의 설명이었다. 일반적으로 모든 소리는 오버 블로윙(over blowing, 관악기 연주에서 숨의 속도와 입술의 압력 조정으로 기본음에 대신 여러 배음들을 만들어 내는 주법. 배음은 기본음 위에 자연스럽게 함께 울리는 소리 성분이다)과 비슷해야 한다는 설명은 서양에서 말하는 조화로운 스펙트럼의 개념과 완전히 반대되는 개념이다. 물론, 이 설명은 초보자에게만 도움이 될 뿐이고 나중에 이 접근 방식을 더 크게, 더 작게, 더 강하게, 더 약하게 만드는 방법을 배우게 되겠지만, 나는 이것이 한국과 서양의 아름다움에 대한 근본적인 차이를 잘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3. 서용석 대금산조
유홍은 학생들에게 도전적인 과제를 내주는 편이다. 나의 경우, 비교적 빨리 서용석 대금산조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다른 선생님들께 배웠다면 나는 훨씬 더 오랜 시간 기다려야만 이런 복잡한 곡을 배울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처음에는 실패로 끝났다. 나는 정간보를 읽는 법을 배워야 했고, 동시에 음악의 매우 미묘하고 복잡한 제스처를 연습해야 했다. 당시에는 한자를 외우는 것이 너무 어려웠으므로, 나는 악보에 음표의 한글 이름을 서양 문자로 적어 도움을 받았다.

그림 1: 서용석 대금산조, 시작, 세바스티안 클라렌과 유홍의 주석이 있는 정간보 표기법
전통적인 교육 방법과 크게 다르지 않게, 나는 선생님의 연주를 녹음한 것을 반복해서 들으며 그 소리와 프레이즈를 따라 하려고 노력했다. 사실 나는 정간보의 리듬 단위에 맞춰 녹음을 한 줄씩 나누어 편집해서 다시 듣고 다시 연주하는 식으로 연습했다. 그렇게 나는 서용석의 대금산조 세계에 점점 더 깊이 빠져들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음악에 대한 나의 감탄은 절정에 달했다. 20세기 서양 음악에서는 작곡가 겸 연주자를 얕잡아 보는 경향이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기교를 과시하는 데에만 목적이 있는 음악을 작곡한다는 평판 때문이다. 물론 예외도 많지만, 서양 음악사를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이러한 평판이 완전히 근거 없는 것은 아니다. 이런 이미지와는 대조적으로, 음악의 질적인 완성도에만 집중하는 듯한 작곡가 겸 연주자가 있었다. 그는 자신의 기교를 숨기고 음악이 그 자체로 빛나도록 했다. 내 생각에, 서용석 대금산조에는 연주자를 돋보이게 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든 소리가 오직 음악을 위한 것이다.
나는 서용석이라는 개인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그가 자신을, 음악의 보존과 발전을 위해, 세대에서 세대로 전승해 온 대금 연주자 전통의 일부로 여겼을 것으로 짐작한다. 이는 음악에서 느껴지는 어떠한 겸손함을 설명해 줄 수 있다. 연주자들은 항상 이 음악이 자신만의 것이 아니라, 그 이전 세대의 모든 연주자의 업적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기 때문이다. 또한, 음악의 세련됨, 특히 단 한 명의 연주자만으로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을 것으로 생각하는 기악 기법의 정교함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나는 서용석 대금산조를 지금까지 본 음악 중 대금 본연의 특징에 가장 부합하는 곡이라고 생각한다. 수많은 세부 요소, 때로는 미세한 차이들까지도 악기 연주에 유연성을 부여하며, 이는 다른 관악기 음악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특징이다. 나는 이 모든 기법과 세부 요소가 음악이 전승되는 과정에서 하나씩 더해졌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가 손에 쥔 것은 사실 음악의 발전에 참여한 모든 연주자의 경험 총합이라고 할 수 있다. 서용석은 이러한 발전의 역사적 종착지였을지도 모르지만, 그는 사후에도 이상적으로 지속될 수 있는 전통의 일부였다.
4. 전통
서용석은 민속악 연주자로서, 악보를 사용하지 않고 구전으로 음악을 전승하는 전통을 이어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서용석 자신이 정간보를 썩 잘 읽지 못했고, 서양식 악보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정간보 악보로 무언가를 보여주려 할 때, 그는 종종 잘못된 구절을 가리키곤 했다. 우리는 그의 기억력이 매우 좋았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조차도 사실이 아니다. 연주할 때 그는 종종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할지 기억하지 못하고 즉흥적으로 새로운 선율을 만들어야 했다. 동시에, 그는 가르칠 때 매우 구체적으로, 한 선율에서 다음 선율로 이어질 수 있는 연결과 그렇지 않은 연결을 학생들에게 정확히 알려주었다. (이는 그가 연주할 때는 좀 더 유동적인 방식으로 다루었지만, 작품의 형식적 구조에 대해 매우 강한 감각이 있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 같다.)
서용석이 생전에 연주 활동을 이어가는 동안 그의 음악은 끊임없이 변화했다. 동시에, 이러한 변화의 밑바탕에는 그의 제자들이 따라야 할 엄격한 규칙이 있었던 것 같다. 서용석의 죽음이나 그의 제자들이 그의 음악을 기록하기로 한 것은 상황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음을 알 수 있다. 첫째, 제자들은 산조의 긴 버전과 짧은 버전을 결정하고, 이 두 가지 형식에 맞지 않는 모든 변형들을 배제해야 했다. 배제된 변형들은 논문에서 다룰 수 있을지 모르지만, 연주 측면에서는 이미 사라진 것이다. 둘째, 산조의 특정 버전을 악보로 정립함으로써 전통은 명백히 단절되었다. 그 순간부터, 선생님이 제자에게 가르쳐준 것을 제자가 자연스럽게 이어받는 것이 아니게 되었으며, 제자가 스승에게 배운 것을 수년에 걸쳐 서서히 변화시키는 과정도 사라졌다. 이제 제자는 평생 서용석 산조의 최종 버전으로 결정된 것을 따라야 하고, 동료들에 의해 악보에 대한 충실성의 정도에 따라 평가받게 된다.
2) 이 모든 정보는 서용석과 깊은 사제관계를 맺었던 유홍과의 오랜 대화를 통해 얻은 것이다. 유홍은 서용석에게 사사할 때, 남원에 있는 서용석의 집에 머물기도 했다.
3) 물론, 이것은 다른 산조에도 해당한다. 역사적으로 산조가 기록된 시점은 곧 그 발전이 멈추고 고정된 형태로 정착된 순간이었다. 공식적인 버전이 존재하지 않아, 현대 연주자들이 역사적 녹음을 바탕으로 자신의 버전을 재구성해야 하는 덜 알려진 산조(예: 강백천 대금산조)도 있는 것 같지만, 일반적으로 주요 산조들이 모두 20세기 후반에 정형화되어, 이전까지 공연 전통의 일부였던 산조의 유기적인 발전이 멈추게 되었다.
5. 기보법
그러나 이러한 매우 일반적인 측면을 넘어, 악보의 실질적인 기능과 유용성은 무엇이고, 어떤 기보법이 어떤 목적에 적합한지 질문할 필요가 있다.
국악 기보를 위해 특별히 개발된 정간보가 바로 이러한 목적을 완벽하게 수행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기본 음조와 박자 패턴이 가장 명확하게 표현되고, 장식 기호 체계인 시김새로 이 기본 정보 주위에 세부 사항이 배치된다.

그림 2: 서용석 대금산조, 시작, 주석 없는 정간보 표기법
시김새를 나타내는 이 기호들은 아주 작은 음의 굴절에서부터 상당히 복잡한 음의 순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폭의 움직임을 나타낼 수 있다. 세부 사항을 미정으로 남겨 두지 않는다. 사실, 매우 복잡한 리듬도 명확하게, 표기될 수 있다. 기본 정보와 세부 사항 사이에 음악의 구조를 명확하게 보여주고 이해할 수 있게 하는 명백한 계층 구조가 있다. 다시 말해, 정간보는 국악을 기보하는 데 완벽한 매개체이다. 국악에서 발생하는 모든 상황을 적절하고 명확하게 다룰 수 있다. 겉으로는 덜 명확해 보일 수 있으나, 중요한 점은 이 악보가 높은 정밀성을 유지하면서도 국악의 핵심 개념 중 하나인 유연성을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국악이나 전통악기의 음악을 서양 기보법으로 표기하는 이유를 물을 때에는, 두 가지 주장이 가장 중요한 것 같다.
첫째, 발전성: 정간보는 국악을 표기하는 데는 적합하지만, 이 음악의 기본적 특성에 맞지 않는 음악을 표기하는 데 사용하기에는 어렵고 어색하다. 따라서 정간보로 표기하면서 국악의 기본적 특성을 벗어나 국악을 발전시키는 것은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매우 어렵다. 다시 말해, 작곡가가 전통악기나 전통 음악적 소재를 사용하면서 국악의 이론적 틀 안에 머물고 싶지 않다면, 서양 기보법(또는 상황에 따라 다른 악보 체계) 으로 작업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둘째, 호환성: 당연히 정간보는 국악을 공부한 음악가들만 사용한다. 따라서 작곡가가 국악기와 비국악기를 결합하거나 국악을 공부하지 않은 사람들도 악보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하려면 서양식 표기법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물론, 상황이 허락한다면 자신만의 표기법을 개발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국악은 서양식 기보법에서 다소 어색해 보인다는 점을 지적해야 한다. 주로 너무 단순해 보이기 때문이다.
그림 3: 서용석 대금산조 <시작>, 서양식 표기법의 표준 악보

음과 제스처 기호를 박자 틀 안에 넣는 정간보와는 달리 서양식 기보법은 시간의 흐름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만 나타내는 것뿐만 아니라 음의 높낮이를 상하로 배치하여 음악에서 일어나는 일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려고 한다. 일반적으로 특정 기호를 몰라도 높은음과 낮은음이 어디에 있는지 쉽게 파악할 수 있으며, 눈으로 음악의 흐름을 따라갈 수 있다. 이는 서양 악보가 단순히 음악을 기록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음악에서 일어나는 일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려 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정간보에서는 음높이 기호와 시김새 기호 사이에 계층 구조가 있다고 말했지만, 이것들은 여전히 동일한 시각적 범위에서 표현된다. 서양식 표기법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다.: 리듬과 음높이를 표시하는 요소와 장식음을 나타내는 요소 간의 시각적 차이는 명확하다. 서양식 기보법은 장식음을 음악에 필수적인 것이 아닌 부차적인 것으로 간주한다는 것을 매우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것은 음악 구조의 본질적인 요소의 하나로 장식음을 사용하는 모든 음악이 서양 악보로 표기되면 시각적으로 단조롭고 평면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음을 의미한다.
앞서 내가 대금을 배우기로 선택한 것이 얼마나 행운인지 말했을 때 언급했듯이, 요즘 산조 레퍼토리를 정간보로 가르치는 유일한 국악기는 대금인 듯하다. 이에 대한 설명을 찾을 수는 없었지만, 역사적인 우연일 수도 있다. 다른 모든 악기의 산조는 서양식 표기법으로 가르친다. 여기서 관찰한 바에 따르면, 이것은 매우 이상한 상황이다. 마치 자기 언어를 배우면서, 훨씬 더 적합한 자국의 문자 체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외국어의 문자 체계를 사용하여 배우는 것과 같다.

글. 세바스티안 클라렌(Sebastian Claren)
세바스티안 클라렌은 하이델베르크, 베를린, 프라이부르크에서 작곡, 음악학, 철학, 그리고 예술사를 공부했다. 그는 발터 짐머만과 마티아스 스팔링거에게 작곡을 사사했다. 다름슈타트 여름 강좌와 오스트라바 뉴 뮤직 데이에서 강사로 활동했고, 2016년부터 2018년까지 라이프치히 음악대학에서 현대음악을 가르쳤다. 2021년부터는 서울대학교에서 작곡을 지도하고 있으며, 현재 베를린과 서울을 중심으로 활발히 활동 중이다.